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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뭣이 중헌디? Scrap

[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신앙이 사람을 해칠 때



[경향신문]
 1960년대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의사가 일요일에 급한 수술을 하느라 환자의 수염을 면도했다가 형사범으로 기소되었다.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이유였다.
안식일에 일정 행위를 금하는 기독교의 계율이 17세기 식민지 시절부터
 ‘블루 로(Blue Law)’라는 이름의 법으로 강제되어 위반하면 형사범으로 처벌되었는데,
1960년대까지도 그 법조항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블루 로는 안식일의 일하기, 여행, 요리, 귀금속 착용,
키스, 빗자루로 쓸기, 침대 정리 등을 금한다.

율법주의는 뿌리가 깊다.
유대인의 율법은 안식일에 ‘일상적 삶’조차 금했는데,
그중 하나는 생명이 위태롭지 않은 환자를 치료하는 일이었다.
예수는 안식일에 환자를 고쳤다가 바리새인들로부터 계율을 어겼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답한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게 아니니….” 시쳇말로 ‘뭣이 중한디?’다.

고비사막에서 1320년대에 발생한 페스트가 중국을 거쳐 유럽 대륙 최초의 발병 지역인

이탈리아에 상륙한 것은 1347년이었다.

당시의 유럽인들은 페스트가 인류의 죄에 대한 신의 경고 내지 징벌이라고 믿었다.

 죄는 회개해야 하는 법, 그들은 교회로 몰려가서 예배를 보며 회개했다.

역병은 물러가지 않았고 오히려 예배 때의 접촉으로 더욱 크게 번졌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정부가 한시적인 예배 중단을 권고하고 지역에 따라선

집회금지 행정명령까지 했음에도 일부 교회에선 종교의 자유를 내세우며 예배를 강행하고 있다.

 “예배하는 순간 천국에서 신선한 공기가 내려온다.

그런데 마스크 써야 돼? 벗어야지.”

최근 어느 금식기도원에서 목사가 한 설교다.

이쯤 되면 주술 수준이다. 그는 또 6·25 전쟁 중에도 예배를 보았으니

어떤 상황에서도 예배를 포기해선 안되며 (현장)예배를 안 드리는 교회의 목사는 ‘또라이’라고 했다.


정치적 편향에 사로잡혀서

예배 강행하는 일부 교회들

공공의 책임은 보이지 않아

기독교의 생명력은 도덕성

사람 해치는 건 신앙 아냐


전쟁 중에도 예배를 보았다니, 훌륭하다.

그러나 역병은 전쟁과 다르다.

평소 같으면 바티칸 교황청 앞의 성베드로 광장에 운집했을 신자들이 한 사람도 없는 곳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홀로 단상에 올라 기도하는 모습과 비교해 보라.

교회 대다수는 정부 조치에 협조적이나,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소규모 교회나

 정치적으로 편향된 것으로 보이는 목사가 운영하는 교회는

아직도 일정 장소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고집하고 있다.


정교분리 원칙을 무시하고 강력한 정치적 주장을 서슴지 않는 종교인들의 집회가

인근의 시민들에게 폐를 끼치더니, 그 편향성은 이제 코로나19 방역이라는

공공의 책임에 대한 도전으로 바뀌어 나타났다.

그들이 문자주의와 교조주의에 갇혀 있는 한, 신앙은 동굴 속에 갇힌 눈일 뿐이다.

그들의 눈엔 이웃에 대한 참되고 올바른 사랑이 보이지 않고

그들이 몸담은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 보이지 않는다.

종교는 윤리나 도덕이 아니다.

그러나 사회적 책임의 영역에선 윤리적·도덕적이어야 한다.

 기독교의 생명력은 도덕성이다.

 그 사회적 효용성은 사람 사는 도리를 지키게 해 준다는 데 있다.

 신앙인들을 담고 있는 사회공동체가 종교에 바랄 수 있는 최소한은

 그 활동이 반사회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디 종교뿐이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교육의 전 분야가 그렇다.

 사교(邪敎)가 따로 없다.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종교가 사교다.

사람이 먼저다. 신앙이 사람을 해치면 신앙의 바른 길이 아니다.

이만 한 상식이 논쟁거리여야 하는지, 딱하다.

예배를 강행하면서 헌법상 종교의 자유에 관한 기본권이나

종교 탄압을 운위하는 논리의 비합리성은 논할 가치조차 없다.

그런 논리를 굳이 기독교의 계명으로 반박한다면, 그중 둘째로 큰 계명이라는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를 들겠다.

비신자에게도 이 계명이 아름다운 것은 그 도덕성 때문이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는 하나님 사랑함은 모이지 않고 올리는 예배로도 가능하지 않은가.

지금의 재난 상황에서 교회가 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증거하는 방법은 밀착해 드리는

예배의 강행이 아니라 ‘물리적 거리 두기’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말한 가상칠언(架上七言)은 비통하고 아름답다.

그중에서도 무조건적 연민을 담고 있어 큰 감동을 주는 것은

자신을 못 박은 로마 병정을 향한 말씀이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무지와 독단이 죄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모임 예배를 강행하는 이들마저 용서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럴 수 없다.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출처 : https://news.v.daum.net/v/20200412205253548




시국이 시국인만큼, 종교도 '사회적 거리두기'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먼저 살아야 종교도 있는 것이지요...


덧글

  • 雲手 2020/04/13 06:35 # 답글

    뭐 얘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 장사 그만 둘 수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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